외로움 처방전

‘외로움 측정 클리닉’은 지하철역 2번 출구 옆에 생겼다. 외로움 수치 정밀 측정. 혈액검사 + AI 심리 분석. 단계별 맞춤 처방. 사회적 고립 예방 프로그램 연계. 서울시가 시범 사업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외로움을 질병으로 분류하고 의료 체계 안에서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한국이 세계 최초였다. 해외 언론에서 다뤘다. 국내 반응은 반반이었다. 이정수는 간판을 여러 번 지나쳤다. 들어간 건 어느 … 더 읽기

수명 연장 부작용

복지관 게시판에 종이가 붙었다. ‘장수 설계 상담 — 90세 이후 재정 계획 무료 컨설팅’. AI 재무 설계 시스템 기반. 예약 없이 방문 가능. 이정수는 게시판 앞에서 오래 서있었다. 예순여덟이었다. 평균수명 95세 시대. 앞으로 27년이 남았다. 27년이라는 숫자를 숫자로는 알고 있었다. 실감은 나지 않았다. 나지 않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랐다. 상담실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나왔다. 얼굴이 … 더 읽기

무인 편의점의 밤

밤 열 시, 이정수는 편의점에 들렀다. 인스턴트 커피가 떨어졌다. 별것 아닌데 그게 마음에 걸려 자기 전에 나왔다. 편의점은 이십사 시간 무인 운영이었다. 계산원 없이, 안내원 없이. 들어서자 천장 카메라가 켜졌다. 구석 의자에 노인이 앉아있었다. 낮에도 본 적 있었다. 다른 날 아침에도. 늘 같은 자리였다. 샴푸를 사는 척, 음료를 드는 척, 실제로는 그냥 앉아있었다. 이정수가 커피를 … 더 읽기

가상 가족

‘패밀리AI’ 서비스 광고가 버스 정류장마다 붙어있었다. 당신의 가족을 AI로. 매일 안부를, 매 순간 함께. 사진 세 장과 목소리 녹음 2분으로 시작하세요. 이정수는 광고를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쳤다. 매번 지나쳤는데, 어느 날은 광고 앞에 서서 전화번호를 오래 들여다보는 노인을 봤다. 노인은 광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정수가 옆에 섰다.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팔십 가까이 되어 … 더 읽기

완벽한 몸의 부작용

헬스장이 달라졌다는 걸 이정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동네 헬스장이 문을 닫은 건 3년 전이었다. 자리에 들어선 건 ‘바디 최적화 센터’였다. 체성분 분석, 운동 처방 AI, 영양 설계 시스템. 회원권 가격이 세 배였다. 이정수는 가지 않았다. 아침 산책으로 충분했다. 센터 앞을 지나다 여자를 봤다. 마흔 초반. 운동복 차림으로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나오지도 않았다. … 더 읽기

손자가 없는 할아버지

놀이터에 아이가 없었다. 은평천 옆 작은 놀이터였다. 미끄럼틀, 그네 두 개, 모래사장. 이정수가 매일 산책하며 지나치는 곳이었다. 십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네가 녹슬었다. 벤치에 노인이 앉아있었다. 이정수와 비슷한 나이였다. 무릎 위에 작은 가방을 올려놓고 있었다. 장난감이 담겨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이정수가 옆 벤치에 앉았다. 노인이 먼저 말했다. “여기 애들이 없네요.” “요즘엔 없어요.” … 더 읽기

아버지의 마지막 직업

스마트팜 보조 관리원 모집 공고를 처음 봤을 때, 이정수는 지원하지 않았다. 나이 제한이 없었다. 일주일 교육 이수 후 즉시 배치. 월 급여 95만 원. 주 3회 출근. AI 운영 시스템 보조 및 현장 점검 업무. AI 보조.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시스템이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AI 교사에게 가던 날이 떠올랐다. … 더 읽기

치매 예방약을 거부한 엄마

카페 창가 자리에 여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마흔 중반쯤 되어 보였다. 커피는 거의 줄지 않았다.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내려놓고, 창밖을 보다가 다시 화면을 들었다. 뭔가를 기다리거나, 뭔가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의 시간이었다. 이정수는 옆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은 아메리카노 하나였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야.” 잠깐 들었다. “어, 나 지금 근처야. 잠깐 들를게.” 전화를 끊고는 화면을 오래 봤다. 들어가기 … 더 읽기

나는 누구인가

뇌 강화 보조제 ‘클리어’가 일반 약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건 2년 전이었다. 기억력과 집중력 개선. 인지 저하 예방. 부작용 임상 0.7퍼센트. 60세 이상 건강보험 적용. 이정수는 처방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내키지 않았다. 은평천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에 남자가 앉았다. 이정수보다 조금 젊어 보였다. 육십 초반. 손에 작은 봉투를 들고 … 더 읽기

폭염 대피소

7월 셋째 주, 서울 낮 최고 기온이 52도를 찍었다. 기상청 AI가 위험 단계 적색 경보를 발령한 건 오전 열한 시였다. 이정수의 AI 비서는 즉시 외출 자제 알림을 보냈다. 실외 체감 온도 57도. 20분 이상 직접 노출 시 열사병 위험. 냉방 취약 가구 긴급 대피소 안내 링크. 이정수는 링크를 열지 않았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전기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