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5년 4월 1일.
국민연금공단은 오전 아홉 시에 공식 발표를 했다. 재정 고갈로 인한 지급 유예. 68세 이상 수급자 중 금융자산 기준 초과자부터 순차 조정. 안내문은 각 수급자에게 AI 비서를 통해 자동 발송됐다.
이정수의 AI 비서는 오전 여섯 시 사십 분에 알림을 보냈다. 그는 알림을 닫고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설탕은 넣지 않았다. 요즘 들어 단 것이 당기지 않았다.
창밖 은평천 방향으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세상이 조용히 무너질 때는 언제나 그랬다.
은평 복지관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정수가 오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봤다. 열 명, 스무 명. 대부분 노인이었다. 누군가 종이를 들고 있었다. 공단에서 온 안내문 같았다. 프린트한 것과 손으로 쓴 것이 섞여있었다.
관리자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나와서 말했다. “안내 사항은 공단 AI 상담으로 연결해드리고 있어요. 저희가 직접 답변드릴 수 있는 사항은 없어요.”
노인 한 명이 말했다. “AI 상담이 뭔지 모르겠어요. 전화가 안 돼요.”
“화면을 터치하시면—”
“화면이 어딨어요.”
이정수 옆에 남자가 섰다.
칠십 초반으로 보였다. 손에 종이를 들고 있었다. 이정수 쪽을 힐끗 봤다가 앞을 봤다.
“받으셨어요.” 남자가 말했다. 인사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투였다.
“네.”
“저는 매달 팔십이만 원 받았거든요.” 남자가 종이를 접었다. “여기에 삼십 년 냈어요. 삼십 년.”
이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본소득이 칠십만 원이니까 별 차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뉴스에서.” 남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이미 화를 다 쓴 사람, 혹은 화낼 기력이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삼십 년 낸 사람이랑 하루도 안 낸 사람이랑 똑같이 칠십만 원이면, 그럼 저는 삼십 년 동안 뭘 낸 거예요.”
복지관 창문 너머로 AI 상담 화면이 보였다. 가상 직원이 미소를 띠고 대기 중이었다. 대기 인원 제로.
이름은 최병수였다. 일흔둘. 전직 버스 기사.
삼십 년을 핸들을 잡았다. 자율주행 버스가 도입되던 2039년에 명예퇴직했다. 퇴직 후 아내와 은평구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내는 작년에 먼저 갔다.
“아내 병원비가 많이 나왔어요.” 최병수가 말했다. “그래서 저축이 없어요. 그러니까 연금이 전부였는데.”
이정수는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어요. AI한테 물어봤더니 개인 재정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재정 상황을 말해줬더니 기다리시면 추가 안내 드리겠다고 했어요.”
“언제요.”
“모른대요.”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갈 곳이 없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갈 곳이 없으니 갈 곳이 없는 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정수는 집으로 걸었다.
삼십 년을 낸 사람과 하루도 안 낸 사람이 같은 칠십만 원을 받는다. 그 문장이 틀린 건지 맞는 건지, 이정수는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판단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최병수가 오늘 밤 무엇을 먹을지.
그 생각은 판단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