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덕신 단종 공지를 확인한 건 오전 여섯 시 이십 분이었다.
이정수는 AI 비서가 보낸 알림을 화면에 띄운 채 한동안 앉아있었다. 제약사 공지문은 짧았다. 수익성 악화로 인한 생산 중단. 기존 처방전 보유자는 잔여 재고 소진 시까지 수령 가능. 대체약 안내는 추후 공지 예정.
열 줄이었다. 십 년짜리 습관을 끝내는 데 열 줄이면 충분했다.
그는 냉장고 위 약통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알약 하나를 올렸다. 작고 하얬다. 이걸 십 년 동안 매일 먹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약이 없었다면 지금 자신의 몸이 어떤 모양이었을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알약을 약통에 도로 집어넣었다. 오늘부터 아끼기로 했다.
은평천 산책로는 오전 일곱 시면 이미 사람들로 채워졌다.
자율주행 배달 드론이 낮은 고도로 지나갔다. 윙 하는 소리가 귀 옆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이정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 두 달 전부터 운항 고도가 낮아진 것 같다고 누군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지만, 민원이 접수되기 전에 알고리즘이 먼저 최적화 공지를 내보냈다. 민원은 접수되지 않았다.
이정수는 매일 같은 속도로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삼십 년 교단에서 생긴 버릇이었다. 수업 시간을 정확히 채우던 리듬이 퇴직 후 산책으로 옮겨왔다. 2043년 봄, AI 교사 도입 공문이 학교에 도착한 날 이후로, 그 리듬만이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었다.
강변 벤치에 남자가 앉아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육십 중반쯤 되어 보였다. 운동복 차림인데 땀이 없었다. 걷다가 쉬는 사람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앉으러 온 사람 같았다. 시선은 강물 위에 고정돼 있었고, 눈을 깜빡이는 간격이 길었다.
이정수는 지나쳤다.
이십 미터쯤 걸었다가 돌아왔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유는 없었다.
“괜찮으세요.”
물음표를 생략한 건 의도였다. 질문처럼 들리면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 예.” 그리고 다시 강을 봤다.
이정수는 옆 벤치에 앉았다.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강물이 낮았다. 요즘 들어 부쩍 낮아졌다. 수위 관리 시스템이 도시 냉각용 지하 배수량을 늘렸다는 공지가 한 달 전에 떴다. 5월인데도 이미 걸을 때 마스크가 필요한 날이 있었다. 벚꽃은 올해도 피지 않았다.
남자의 이름은 박상철이었다. 전직 회계사. 예순다섯.
이야기는 천천히 나왔다. 이정수가 먼저 자신의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AI 교사 도입 이후 조기퇴직한 것, 은평구 빌라에 혼자 사는 것, 매일 아침 여기를 걷는 것.
박상철은 듣다가 말했다.
“저도 비슷하게 됐어요. 이 년 전에.”
회계법인이 AI 감사 시스템으로 전면 전환한 건 2043년이었다. 박상철은 그때 희망퇴직 신청서를 받았다. 퇴직금으로 버티다 이제 기본소득 칠십만 원으로 살았다.
“그것보다,” 그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리덕신, 아세요.”
이정수는 아침 약통 생각이 났다. 냉장고 위에 두고 온 것.
“알죠.”
“저 그거 팔 년 먹었어요. 팔 년.” 박상철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오늘 단종됐다고 알림 왔어요.”
이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요.” 박상철이 천천히 말했다. “그 약이 없으면 저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팔 년 전 몸으로. 근데.”
그는 잠깐 멈췄다.
“팔 년 전 내 몸이 어땠는지 기억을 못 해요.”
강물 위로 드론 한 대가 지나갔다. 배달 완료 알림음이 어디선가 짧게 울렸다. 주변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귀에 무언가를 꽂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세계에 접속해 있었다.
“오늘 아침에,” 박상철이 다시 말했다. “거울을 못 봤어요.”
이정수는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흰 머리. 안경. 깊어진 주름. 육십팔 년이 얼굴에 다 쌓여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봤다.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오래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는 걸 오늘 알았다.
냉장고 위 약통을 꺼냈다. 열었다. 아침에 도로 집어넣었던 알약이 그대로 있었다.
삼십 년 동안 학생들에게 말했다. 언어는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고. 이름이 없으면 경험도 없는 것처럼 사라진다고.
약이 끊겨도 몸은 남는다. 그 몸이 어떤 몸인지 알아가는 것, 그게 이제부터의 일인 모양이었다.
박상철의 말이 귓가에 남아있었다.
기억을 못 해요.
이정수는 알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서있었다. 창밖 하늘은 흐렸다. 5월 하늘이 이렇게 탁한 것도, 이제는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