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 강화 보조제 ‘클리어’가 일반 약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건 2년 전이었다.
기억력과 집중력 개선. 인지 저하 예방. 부작용 임상 0.7퍼센트. 60세 이상 건강보험 적용. 이정수는 처방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내키지 않았다.
은평천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에 남자가 앉았다.
이정수보다 조금 젊어 보였다. 육십 초반. 손에 작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약국 봉투였다.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거 드세요?” 약국 봉투를 살짝 들어 보이면서.
이정수가 봤다. 클리어였다.
“안 먹어요.”
“왜요.” 남자가 물었다. 따지는 게 아니었다. 진짜 궁금한 것 같았다.
“그냥요.”
남자는 봉투를 무릎 위에 내려놨다. “저는 세 달째 먹고 있어요.” 잠깐 멈췄다. “근데 요즘 이상한 게 있어요.”
이름은 정해운이었다. 예순둘. 전직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정수와 같은 해에 퇴직했다. AI 교사 도입으로. 이정수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잠깐 같은 공기가 흘렀다.
“기억이 좋아졌어요. 확실히.” 정해운이 말했다. “예전엔 학생 이름도 헷갈렸는데, 지금은 30년 전 반 아이들 이름이 다 떠올라요. 신기하더라고요.”
“좋은 거 아닌가요.”
“그게.” 정해운이 강물을 봤다.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문제예요.”
이정수는 책을 덮었다.
“30년 전 제가 화냈던 것들이 다 생각나요. 애한테 큰 소리 쳤던 것, 아내한테 잘못했던 것. 전엔 흐릿했는데, 지금은 그게 다 HD로 보이는 것 같아요.” 정해운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게 나예요? 그 기억들이? 아니면 그 기억을 잊고 지내던 내가 나예요?”
이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정해운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달라졌다고. 좋은 뜻은 아니었어요. 전에는 그냥 넘어갈 일을 요즘은 너무 오래 붙잡는다고.”
“오래 붙잡는 게 나쁜 건가요.”
“모르겠어요.” 정해운이 봉투를 들었다 놨다 했다. “약을 끊으면 다시 잊어버리겠죠. 그럼 편해질 거예요. 근데 그렇게 잊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잊는 것이 회복인지, 회피인지.
이정수는 자신의 기억을 생각했다. 2038년 이혼.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큰 소리를 쳤던 날. 2043년 조기퇴직 통보를 받던 아침. 그 기억들이 지금은 흐릿했다. 흐릿해진 게 다행인지, 손실인지, 그도 답을 몰랐다.
“그 약 계속 드실 거예요?” 이정수가 물었다.
정해운이 한동안 봉투를 봤다.
“오늘은 샀어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강물이 낮게 흘렀다. 드론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어딘가에서 자율주행 버스 정차음이 짧게 울렸다.
정해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뭘 잊고 싶으세요.”
이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해운은 기다리지 않고 걸어갔다.
이정수는 한동안 그 질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었다.